대승불교의 아버지, 중관학(中觀學)의 ‘용수’ 나가르주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관학의 중도, 공, 자성에 대한 비판 무자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가르주나
용수 龍樹, 150?~250?
나가르주나는 인도사람입니다. 제2의 부처라고 불리는 대승 불교의 아버지인데요. 한역하면, 나가(용 용) 르주나(나무 수) 그래서 용수입니다.
그런데 용수란 이름에 대해서는 다양한 썰들이 있습니다. 모친이 아르주나 나무 아래서 용수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나가(=용)의 인도로, 도를 이루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설 등 다양한 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성(自性) VS 무자성
대승은 소승(=부파)을 비판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대승의 시작을 ‘용수’라고 봐도 됩니다. 그렇다면 용수는 무엇을 비판했을까요? 그리고 어떤 주장을 했을까요?
용수는 부파불교가 주장하는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고 ‘무자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부파불교의 자성
그럼 먼저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자성(自性)이 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부파불교의 자성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불변의 고유한 본질(서양적으로는 실체, substance)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부파불교할 때도 간단히 소개해 드렸었는데요 석가는 이야기로 쉽게 풀어주며, 눈높이 교육을 했던 설법을 참 잘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석가 사후, 부파(소승) 불교는 결집(모임)을 통해 석가의 말씀 정리합니다.
그게 니까야(아함경)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과정에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체계 갖춘 사상들의 도전을 받으며 부파불교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삼장 중에(경장, 율장, 논장) 주로 논이 발달합니다. 석가의 말씀에 기초하여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건데요,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석가가 비판했던 개념을 활용했던 것이죠. 이 때문에 석가에게서 멀어지게 된 부분이 생깁니다.
참고. 유학에서도 현실적 실천을 강조한 공맹의 사상이 불도의 비판을 받으면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게 되죠. 그게 신유학 성리학이였는데요, 불도를 비판하며 시작한 유학이 불도를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후대에 맹자에 대한 주자의 해석은, 정약용에 의해 비판받게 됩니다. 주자의 공맹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결국 주자와 소승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인물이 비판하고자 한 사상을 활용하는데서, 문제가 나타난 거라고 할수 있을겁니다. |
용수가 보기에 부파불교가 석가 잘못 이해해서 자성의 개념을 주장하더라는 겁니다. 연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성이 없다 = 무자성’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실제로 부파불교중 가장 강력했던 설일체유부는 아주 작은 분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극미설을 주장했었는데요, 서양 철학에서 말하던 물질의 가장 기본단위인 원자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수는 모든 것은 인연의 산물... 인연에 의해 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것이어서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중관(中觀)
용수를 중관학파라고 하는데요. 왜 중관학이라고 할까요?
중관? 가운데 중(中), 볼 관(觀)
중은 중도를 의미하는데요. ‘중관’은 중도의 입장에서 본다라는 겁니다. 정확히는 ‘중도의 관점에서 공의 원리를 보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합니다.
핵심 사상을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중도’와 ‘공’인 것이죠
공(空)
그럼 ‘공(空)’부터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이란 표현이 석가에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걸 체계화시킨 인물이 용수입니다. 석가의 연기에 대한 용수의 논문, 논문은 논으로 끝나죠. 그게 중론입니다.
그러니 석가의 연기가 용수의 중관학으로 정리되었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석가의 연기느 만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불변하는 것이 없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었죠. 그러니 중도의 관점에서 공을 보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실상)을 파악하는 것[진여]’입니다. 결국, 연기하는 모든 것은 공하므로 자성이 없다는 것이죠.
그럼 남은 것은 ‘중도의 입장에서’인데요, 중도는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양극단은 유와 무입니다. 그러니 ‘유(有)도 아니도 무((無)도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겁니다.
"진리로서의 중은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라는 건데요, 무(無)가 아니다! 비무(非無)는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 보세요? 뭐가 있어요?
펜이, 여기는? 옷이 있죠. 그렇다면 비무는 ‘없지 않다’는 이해가 쉽게 되실 겁니다. 그런데 ‘유(有)가 아니다! 비유(非有)~ 있지 않다! 이게 이해가 조금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펜을 비유로 들었으니 펜으로 이해해 보겠습니다.
이 펜은 몇 년 뒤에도 이 모습일까요? 부서지거나 해체되겠죠. 그럼 이 펜은 없죠. 그러니 있지 않다. 비유(非有)죠. 그러나 이 해체된 펜의 스프링은 쇠 형태로 있거나 겉은 플라스틱의 형태로 있거나, 아니면 재활용되어 다른 것이 되어 있겠죠.
그러니 역시 무도 아닙니다. 결국 결론은 고유한 속성(=실체)이 없다는 겁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거죠. 그럼 내 눈에서 사라져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결국은 내 눈에서 사라진 것뿐이지. 순환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종이에 불을 붙여 태우면 불꽃을 일으키며 몇 초 안에 모두 타버려서 우리 시각에서 사라지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일 뿐 에너지로 변화하여 존재하게 되죠.
유라고 하면 있다가 되어, 독자적 성격이 있는 거고 무라고 하면 없다가 되어, 독자적 성격이 있는 것이니 고정된 실체, 독자적 속성, 자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관련성 연관성 속에 변화하고 있으므로, 자성이 없다는 겁니다.
중관 사상은 공 개념을 통하여 모든 존재와 현상은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용수는 반야경을 중시 여겼는데요. 반야경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공사상을 용수는 석가의 연기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반야경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교리가 있습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입니다. 물질과 공 또는 공과 물질의 관계를 표현한 불교교리인데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고 번역하는데요.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니.
색이 곧 공임을 깨닫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저는 색즉시공~ 그러면 영화가 떠오르니 큰 깨달음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교 용어를 사용한 영화들이 참 많았는데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색계... 그런데 불교 관련 영화들은 19금이 많습니다.
왜일까요?
심오해서?
글. 가생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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